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두 유비혜릉 (문단 편집) == 소개 == 중국 [[쓰촨성]] [[청두시]] [[무후사]](武侯祠)에 있는 [[촉한]]의 황제 [[유비]](劉備)의 능묘(陵墓). 유비의 묘는 혜릉(惠陵)이라고 불린다. 이곳은 유비의 능묘이지만 동시에 그의 신하인 [[제갈량]](諸葛亮)의 사당(무후사)이기도 하며 유비 외에도 [[관우]], [[장비]] 등 그와 생사고락을 같이한 촉한의 신하들 역시 같이 기리는 장소이기도 하다. 두보의 고백행이라는 시에도 나오듯이 이미 당나라 이전시기부터 유비의 묘와 제갈량은 같은 사당에 모셔져 있었던 것 같다. 북쪽에 위치한 본당을 중심으로 남쪽을 향해 하나의 축을 이루는 구조다. 유비의 무덤은 유비묘(劉備墓)라고도 하며, 청두 무후사의 정전 서쪽에 있다. 223년, 유비가 [[백제성]]에서 붕어한 뒤, 제갈량은 유비의 시신을 5월에 청두로 옮기고 8월에 혜릉에 매장하였다. 유선은 제갈량의 건의에 따라 유비의 부인이자 자신의 어머니 소열황후 [[감부인]]을 합장했고 후일 후비인 [[목황후]]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의 유골도 합장하였다. 면양에 세워진 무후사는 촉한 당대에 지어졌지만 성도의 무후사는 [[성한]]의 [[이웅]]이 촉한이 망한 지 50여 년 만에 무후사를 만들고, 지금의 장소에 옮겼다. 이민족 정권인 성한 정권 입장에선 사천 주민들의 추앙을 받는 제갈량의 위상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. 5세기 이후엔 유비, 제갈량 두 사람이 성군, 현신의 본보기로 합사된 것이 확인되고 적어도 명나라 홍무제의 아들 촉헌왕 주춘이 제사를 지낸 것이 확인되니 그 연원이 오래 되었다. 이후에도 [[두보]]를 비롯한 많은 명사들이 이곳을 방문하기도 했다. 현재 남은 옛날 건축물 상당수는 명나라 말에 난리 때 불에 타 청나라 강희제 때 재조성된 것이고, 성도 무후사 박물관으로 1961년에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. 참고로 촉한이 망할 때 끝까지 항전을 주장한 [[유심]]의 상은 할아버지 유비 옆에 그대로 세워져 있지만 유선의 제위는 나라를 말아먹은 어리석은 군주라고 하여 [[남송]] 때 없애버렸다. 유비의 황릉은 [[명나라]]와 [[청나라]] 시대에 황제가 직접 능을 보수하고 비석까지 세우는 등 극진하게 대우하였다. 황당한 것은 여러 곳에서 자기네 땅에 유비묘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, 유비의 묘가 성도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주장은 역사적 근거가 부실하며 다른 곳에 이장됐다는 정식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. [[송나라]] 초 지리서인 태평환우기(太平寰宇記) 권72에 따르면 그의 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익주 성도현에 있어 동릉(東陵)이라고 하니, 바로 유비의 능이라 하였고 사당이 있어, 동릉신(東陵神)이라 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